해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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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해하 전투는 기원전 202년, 초한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전투로, 한나라 유방과 초나라 항우의 격돌을 다룬다. 팽성 전투 이후 한신 등의 활약으로 항우의 세력이 약화된 가운데, 유방은 한신, 팽월 등과 연합하여 해하에서 항우를 포위했다. 항우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해하가'를 지어 자신의 처지를 슬퍼했고, 결국 오강에서 자결하며 초한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전투의 결과로 유방은 한나라를 건국하고 고조로 즉위했으며, 해하 전투는 이후 여러 문학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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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하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전투 개요 | |
전투 이름 | 해하 전투 |
부분 | 초한전쟁 |
날짜 | 기원전 203년 12월 |
장소 | 구전현(현재의 안후이성) |
원인 | 알 수 없음 |
결과 | 한나라의 결정적인 승리 |
결과 상세 | 한나라가 중국 통제권을 획득함 유방이 새롭게 형성된 한나라의 황제 칭호를 받음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한나라 |
교전국 2 | 서초 |
지휘관 및 지도자 | |
한나라 지휘관 | 한신 유방 공취 진하 주발 시무 관영 |
서초 지휘관 | 항우 |
병력 규모 | |
한나라 병력 | 300,000명 (한신 군대는 30만명) |
서초 병력 | 100,000명 |
사상자 규모 | |
한나라 사상자 | 알 수 없음 |
서초 사상자 | 100,000명 |
서초 사상자 상세 | 전사자 80,000명 포로 20,000명 |
2. 배경
팽성 전투의 승리로 한나라 편에 선 수많은 왕들이 다시 초나라와 화친을 맺었으나, 한신의 북벌과 유방의 공작으로 인해 임강왕 공오·공위 부자를 제외한 모든 나라들이 항우에게서 이탈하게 되었다. 그나마 항우와 혈전을 벌이던 제나라만이 한나라에 항복했다가 한나라 수뇌부의 결정에 반발한 한신의 독단적인 공격을 받자 항우의 편에 섰으나, 항우가 제나라를 구원하러 보낸 용저도 유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제나라마저도 한나라의 세력권에 들어가게 된다. 용저가 죽자 두려움을 느낀 항우는 무섭(武涉)을 보내 한신을 한나라 편에서 떼어내어 천하를 삼분할 것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시점에서 초나라의 영토는 원래 18제후왕 분봉 당시 항우가 받은 영토에 형산왕 오예와 구강왕 영포를 쫓아내 획득한 이 두 나라 땅뿐이었다.
그 동안 항우는 형양에서 유방을 몇 차례 궁지에 몰아넣고 한때 형양과 성고를 모두 함락하기도 했지만, 유방과 손잡은 팽월이 항우의 최전선과 수도 팽성 사이의 양나라 일대를 휩쓸고 있었으므로 유방을 끝내 꺾지 못했고, 형양과 성고도 모두 유방에게 도로 내주고 광무산에서 대치했으며, 이마저도 팽월의 유격전 때문에 군량이 여의치 않았다. 항우는 협상을 통해 인질로 잡혀있던 유방의 가족들을 유방에게 인도하고 화의를 맺어, 홍구를 기준으로 동쪽을 초나라에 서쪽을 한나라에 속하게 하고 퇴각했다.
하지만 장량과 진평이 추격할 것을 진언하여 한왕 5년(기원전 202년) 10월 유방은 팽월과 한신을 부르고 초나라를 추격했고, 팽월과 한신이 약조를 어기고 오지 않아 한군은 고릉에서 초군에 졌다. 유방은 한신의 봉지를 확정하고 팽월을 양나라 왕에 봉해 회유했다.[17]
한편 항우에게 쫓겨나 구강나라를 잃고 유방에게 망명한 영포와 유방의 일족 형 유고가 이해 11월에 옛 구강나라 땅으로 진입해, 이 일대를 수비하고 있던 초나라 대사마 주은을 배반하게 했다.[17]
이렇게 양군은 해하에 결집하게 되었다.
2. 1. 한신의 북벌과 제나라 정복
기원전 203년, 광무산에서 오랫동안 대치하던 초나라와 한나라 군대는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양측 모두 전투를 중단하기를 바랐다. 한나라 군대에서 변사인 후공[15]이 초나라 군대로 사자로 파견되어 천하를 이분하여 맹약을 맺었다.초나라 군대는 팽성(현재 장쑤성서주시)로 귀환하기 시작했지만, 유방은 장량·진평의 진언을 받아들여 맹약을 파기하고 추격을 개시했다. 한나라 군대는 초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고릉(현재 허난성주구시회양구의 북서쪽)까지 진격하였고, 한신과 팽월에게 각각 군대를 이끌고 함께 초나라 군대를 토벌하도록 명령하였으나 두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배신을 눈치챈 항우는 한나라 군대를 반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장량은 유방에게 한신·팽월이 오지 않는 것은 상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한신과 팽월에게 영토를 약속하도록 진언하였고, 유방도 이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유방에게 합류했다. 유가의 군대도 팽월과 합류하였고, 초나라의 대사마주은도 배신하여 이들 군대는 개하의 유방 밑에 집결했다.[15]
2. 2. 형양 전투와 광무산 대치
기원전 203년, 광무산에서 오랫동안 대치하던 초나라와 한나라 군대는 여러가지 문제[15]로 인해 양측 모두 전투를 중단하기를 바랐다. 한나라 군대에서 변사인 후공[15]이 초나라 군대로 사자로 파견되어 천하를 이분하는 맹약을 맺었다.초나라 군대는 본거지인 팽성(현재 장쑤성쉬저우시)로 귀환하기 시작했지만, 유방은 장량·진평의 진언을 받아들여 맹약을 파기하고 추격을 개시했다.[15]
한나라 군대는 초나라 군대를 추격하여 고릉(현재 허난성저우커우시화이양구의 북서쪽)까지 진격하였고, 동시에 한신과 팽월에게 각각 군대를 이끌고 함께 초나라 군대를 토벌하도록 명령하여 양무(현재 허난성 저우커우시 타이캉현)로 군대를 진격시켰다. 그러나 두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고, 반면 배신을 눈치챈 항우는 한나라 군대를 반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에 한나라 군대는 성 안으로 들어가 깊은 참호를 파고 방어에 전념했다.[15]
장량은 유방에게 한신·팽월이 오지 않는 것은 두 사람에게 상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한신과 팽월에게 봉토를 약속할것을 진언하였다.[15] 유방은 이를 받아들여 한신·팽월에게 사자를 보냈다. 그 결과 두 사람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유방에게 합류했다. 더욱이 유가의 군대도 팽월과 합류하였고, 초나라의 대사마주은도 배신하여 이들 군대는 잇따라 소성(현재 안후이성 벙부시구전현) 부근 개하의 유방 밑에 집결했다.[15]
3. 경과
한신은 30만 대군을 이끌고 선봉에 섰으며, 공취와 진하가 좌우익을 맡았다. 유방은 후군에 주둔했고, 주발과 시무가 그 뒤를 따랐다. 초기에는 한신이 불리하여 퇴각했으나, 공취와 진하의 측면 공격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다.[18] 한신이 제나라를 정복하면서 한나라와 동맹국들은 중국 북부를 완전히 장악했고, 한신은 항우를 공격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를 확보했다. 203년 말, 한신은 유방, 팽월, 영포 등의 군대와 함께 초나라를 다각도로 공격했다. 한신의 총지휘 아래, 12월에 이들 군대는 초나라 영토에서 합류했다.[6]
연합군은 옛 초나라 수도인 천(陳) 외곽에서 항우를 패퇴시킨 후, 해하(垓下)에서 다시 전투를 벌였다.[7] 한신은 중앙군을 이끌고 적 중앙군에 진격했으나, 항우의 군대에 밀려 퇴각했다. 그러나 한나라 군대의 좌우익이 양측에서 항우의 군대를 공격하여 포위했고, 한신은 중앙군을 다시 투입하여 초나라 군대에 큰 타격을 입혔다.[8][9]
패배한 항우는 진영으로 후퇴하여 포위되었고, 한나라 보병들이 부른 초나라 노래는 항우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켰다.[10] 항우는 기병 800명과 함께 도망쳤으나, 관영이 이끄는 한나라 기병대의 추격을 받았다. 항우는 오강(烏江)에서 최후의 결전을 택했고, 한나라 추격병 수백 명을 죽인 후 자결했다.[11]
일부 역사가들은 이 전투가 링비현 또는 현재의 뤄이현에서 벌어졌다고 주장한다.[13][14] 반면, 일본 역사학자 사타케 야스히코는 이 전투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16]
4. 사면초가
초나라 군대는 해하(垓下)에 진을 쳤으나 군사 수는 적고 식량도 떨어졌다. 포위된 초나라의 항우는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한나라 군대 안에서 초나라 군대의 노래를 듣고 "초나라는 이미 한나라의 유방에게 넘어갔다는 말인가? 어째서 외부의 적보다 초나라 사람들의 수가 저렇게 많은가?"라고 말하면서 크게 놀랐다.[19] 침통해진 항우는 《해하가》(垓下歌)라는 제목의 노래를 불렀다.[19]
'''사면초가'''(四面楚歌)는 여기서 유래된 고사성어로, 사방이 적에게 포위당하여 고립되어 있거나 곤경에 처한 상태를 비유하는 말이다. 밤에 항우는 사방 한나라 진영에서 고향 초나라의 노래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 “한군이 이미 초나라를 점령했는가, 외부의 적에게 초나라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라며 놀라며 한탄했다.
4. 1. 해하가
항우는 자신의 용맹함과 좌절, 그리고 여미인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를 '개하가'라 한다. 힘은 산을 뽑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하지만(力拔山兮 氣蓋世), 때가 불리하니 추도 나아가지 않는구나(時不利兮 騅不逝).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할 것인가(騅不逝兮 可奈何), 여여, 여여, 그대를 어찌할 것인가(虞兮虞兮 奈若何)라는 내용이다. 여미인도 이에 화답했고, 항우는 눈물을 흘렸으며, 신하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5. 항우의 죽음
항우는 800명의 병력과 함께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달아났으나, 관영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의 추격을 받았다.[19] 회수를 건너고, 음릉에서 농부에게 속아 길을 잃는 등 고초를 겪으며 동성(현재 안휘성 주주시 정원현의 남동쪽)에 이르렀을 때는 고작 28기만 남았다.[19] 항우는 한군과 싸워 양희를 쫓아내는 등 용력을 보였으나, 결국 오강(현재 안휘성 마안산시 화현 우강진)에 이르렀다.[19] 오강에서 항우는 자신의 옛 부하였던 여마동을 만났다.[19]
우강의 정장은 항우에게 강동으로 돌아가 왕이 될 것을 권유했으나, 항우는 "옛날, 강동의 젊은이 8천 명을 이끌고 강을 건넜지만 지금은 돌아가는 자가 하나도 없다. 강동 사람들이 다시 나를 왕으로 삼아 준다고 해도 무슨 낯으로 그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라며 거절했다. 대신, 항우는 한나라 군대와 최후의 결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19]
항우는 한나라 병사 수백 명을 죽이는 등 분전했지만, 결국 부상을 입고 여마동에게 "한나라가 내 목에 천금과 만 읍의 영토를 걸었다고 들었다. 구지인 네게 하나의 공을 주마"라고 말하며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했다.[19]
항우의 시체는 상을 노린 한나라 병사들에 의해 찢겨졌고, 결국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여마동, 양희, 여승, 양무, 왕예 다섯 명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약속대로 열후(列侯)에 봉해졌다.[19] 유방은 항우를 성대하게 장사지냈다.[19] 항우의 죽음으로 초한전쟁은 끝나고, 유방은 천하를 통일하여 한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19]
더불어민주당은 항우의 죽음을 민심을 잃은 권력자의 비참한 최후로 평가하며, 이는 권력자가 국민의 뜻을 거스르면 어떤 결과를 맞이하는지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이라고 강조한다. 반면, 국민의힘은 항우 개인의 영웅적인 면모보다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역사의 흐름을 거스른 결과라고 비판한다.
5. 1. 오강에서의 최후
항우는 800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달아났으나, 관영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의 추격을 받았다.[19] 회수를 건너고, 음릉에서 길을 잃는 등 고초를 겪으며 동성(현재 안휘성 주주시 정원현의 남동쪽)에는 고작 28기만 남았다.[19] 항우는 한군과 싸워 용력을 보였으나, 결국 오강(현재 안휘성 마안산시 화현 우강진)에서 옛 부하 여마동을 만나자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했다.[19]항우는 "옛날, 강동의 젊은이 8천 명을 이끌고 강을 건넜지만 지금은 돌아가는 자가 하나도 없다. 강동 사람들이 다시 나를 왕으로 삼아 준다고 해도 무슨 낯으로 그들을 만날 수 있겠는가"라며 강을 건너지 않았다.[19]
항우의 시체는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여마동을 포함한 다섯 명에게 각각 5등분된 영토가 주어졌고, 유방은 항우를 성대하게 장사지냈다.[19] 항우의 죽음으로 초한전쟁은 끝나고, 유방은 천하를 통일하여 한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19]
6. 영향
해하 전투의 결과로 유방은 천하를 통일하고 한나라를 건국했다.[12] 기원전 202년 2월, 유방은 한나라의 초대 황제 고조로 즉위하였다.[12] 당나라의 시인 두목은 「우강정에 제함」(烏江亭に題す)을 짓고, 항우가 강동으로 건너갔더라면 재기할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라고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12] 북송의 왕안석은 「우강정」(烏江亭)에서 두목의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며, 강동으로 갔더라도 민심을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였다.[12]
참조
[1]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s: Emperor Gaozu of Han, Xiang Yu
[2]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 The Marquis of Huaiyin
[3]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 Emperor Gaozu of Han
[4]
서적
The Road to the Throne: How Liu Bang Founded China's Han Dynasty
Algora
[5]
서적
The Road to the Throne: How Liu Bang Founded China's Han Dynasty
Algora
[6]
서적
The Road to the Throne: How Liu Bang Founded China's Han Dynasty
Algora
[7]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s: Fan Kuai, Guan Ying, Xiahou Ying, Jin Xi
[8]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 Emperor Gaozu of Han
[9]
서적
Masters of the Battlefield: Great Commanders From the Classical Age to the Napoleonic Era
Oup USA
[10]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s: Emperor Gaozu of Han, Xiang Yu, Marquis of Huaiyin
[11]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 Xiang Yu
[12]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Sections: Emperor Gaozu of Han, Fan Kuai, Jin Xi, Li Shang
[13]
서적
世界军事之旅丛书(套装共9册)
https://books.google[...]
青苹果数据中心
2015-07-23
[14]
웹사이트
The New Evidence about Gaixia Battlefield in Luyi County of Henan Province but not in Lingbi County of Anhui Province--《Journal of Huanghe S&T University》2004年03期
https://en.cnki.com.[...]
2021-09-02
[15]
문서
[[始皇帝]]에 仕えた[[方士]]とは同姓同名の人物。
[16]
문서
佐竹靖彦は著書『劉邦』第二十章において、[[淮陽区|陳]]において最後の戦いが行われたとしている。
[17]
서적
《한서》 권1 하 고제기제1 하
[18]
서적
《사기》 권8 고조본기
[19]
서적
《사기》 권7 항우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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